[한겨레S] 김도훈의 낯선 사람
가수 김지연
가수 김지연은 1집 앨범에 수록된 노래 ‘찬바람이 불면’으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지만, 단 하나의 인기작만 남긴 ‘원 히트 원더’ 가수로 남았다. 유튜브 영상 갈무리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듣는 노래가 있다. 김지연의 ‘찬바람이 불면’이다. 당신이 갓 중년에 접어든 사람이라면 제목을 듣는 순간 저절로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찬 바람이 불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 스쳐 가는 바람 뒤로/ 그리움만 남긴 채/ 낙엽이 지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 떨어지는 낙엽 위엔/ 추억만이 남아 있겠죠.” 흔한 이별 노래처럼 들리지만 가사는 꽤 독특한 운치가 있다. 찬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면 나는 당신을 떠나겠다는 가사는 특별할 게 없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면서 노래는 살짝 턴을 한다. “한때는 내 어린 마음 흔들어주던/ 그대의 따뜻한 눈빛이/ 그렇게도 차가웁게 변해버린 건/ 계절이 바뀌는 탓일까요.” 떠나는 그의 마음은 돌아섰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이 돌아선 이유가 사랑이 떠나서 그런 거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계절을 탓한다. 계절이 바뀌면 많은 것이 변하게 마련이니까. 노래의 마지막은 꽤 단호하다. “찬 바람이 불면/ 그댄 외로워지겠죠/ 그렇지만 이젠 다시/ 나를 생각하지 말아요.” 그대의 마음이 떠났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떠날 것이다. 그대가 나를 잡을지 말지는 알 수가 없다. 잡아도 소용없다. 어쨌거나 나는 떠날 것이다. 내가 그립더라도 다시 연락은 하지 말아 달라. 꽤 단호한 메시지다.
가을마다 떠오르는 ‘찬바람이 불면’
단정함 돋보인 대표적 원 히트 원더
‘찬바람이 불면’은 한국방송(KBS)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 등장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1987년부터 90년대 초까지 방영된 이 드라마는 가족 이야기를 핑계로 댄 연애물이었다. 최재성, 최수종, 이미연, 최수지, 신애라, 이상아, 김민희 등 당대 젊은 배우가 출연했다. 최재성은 절정의 스타였는데 중간에 하차하고 아역 배우 출신 스타 손창민이 투입됐다. 이상아도 이미 아역 스타였다. 그런데 끝날 무렵에는 신인 최수종과 이미연이 스타덤에 올랐다. 드라마 속에서 청춘스타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다. ‘찬바람이 불면’은 최수종과 이미연의 테마곡이었다. 부잣집 아들인 의대생 최수종과 가난한 간호사 이미연(이 휘황찬란할 정도로 90년대적으로 구태의연한 역할이라니!)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쓴 사랑을 나누는 사이였다. 둘 사이가 조금만 위태로워질 법하면 꼭 ‘찬바람이 불면’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사춘기가 근질근질하게 오기 시작하던 나이에는 슬픈 사랑 노래가 그렇게 당기게 마련이다. 나는 ‘찬바람이 불면’을 부른 김지연의 1집을 카세트테이프로 샀다. 테이프를 감고 또 감으며 ‘찬바람이 불면’을 반복해서 들었다. 사랑을 해보지도 않은 주제에 이별의 노랫말은 그렇게 가슴을 때렸다. 80년대 말 가장 인기 있던 가수 중 한명은 ‘바람아 멈추어다오’의 이지연이었다. 나는 이지연과 김지연이 나란히 ‘10대 가수상'을 받는 장면을 그리곤 했다. 어린 나이의 내가 보기에도 김지연은 스타성이 있었다. 김지연은 ‘10대 가수상’을 받지 못했다. ‘찬바람이 불면’이 큰 성공을 거두고 그는 앨범 두장을 더 냈지만 히트곡을 내지 못하고 잊혀졌다. 아쉬운 일이었다. 발라드도 ‘뽕끼’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는 뽕끼 없이 단정하게 노래를 불렀다. 기교 없이 노랫말을 꼭꼭 씹어서 전했다. 모던했다. 노래도 모던했고 가수도 모던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1968년생인 그는 대학 시절부터 대전 지역 통기타 그룹의 일원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당대 스타의 산실이던 에 ‘쉿, 나의 창을 두드리지 마’라는 노래로 참가한 이력도 있다. 데뷔곡인 ‘찬바람이 불면’이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으니 그 역시 당연히 스타가 되어야 마땅했다. 슬프게도 그는 ‘원 히트 원더’로 잊혀졌다.
우리는 단 하나의 노래만 히트시키고 사라진 가수들을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라고 부른다. 영어로 된 저 단어는 이제 엄연한 한국어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세상에는 많은 원 히트 원더가 존재한다. 데비 분의 ‘유 라이트 업 마이 라이프’, 바비 맥페린의 ‘돈 워리 비 해피’, 고티에의 ‘섬바디 댓 아이 유즈 투 노’가 잘 알려진 사례들이다. 한국에도 꽤 알려진 원 히트 원더들이 있다.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 황치훈의 ‘추억 속의 그대’,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등이 대표적이다. 전주를 들으면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시대의 명곡들이지만, 정작 가수들은 단 한번의 절정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어떤 이들은 다음 앨범을 내지도 못했다. 황급히 사라졌다. 어떤 이들은 새 앨범을 계속해서 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다. 천천히 사라졌다. 단 한번으로 사라지는 것보다 서서히 잊히는 것은 더 슬픈 일이다. 김지연의 ‘찬바람이 불면’은 또 하나의 원 히트 원더와 연결된다. 가수 자신의 이름을 과감하게 제목에 넣은 ‘김성호의 회상’이다. 제목을 듣자마자 중년이 된 당신은 저절로 입으로 소리 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지/ 그녀는 조그만 손을 흔들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의 눈을 보았지”로 시작해 “보고 싶은 마음 한이 없지만/ 찢어진 사진 한장 남지 않았네”로 끝나는 바로 그 노래다. 1989년에 발매된 이 노래를 라디오로 처음 들었던 순간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노래가 너무 슬펐다. 끔찍하게 슬픈 나머지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특히 “찢어진 사진 한장 남지 않았네”라는 대목이 가슴을 찢었다. 사실 이 대목은 2021년에는 효용이 없다. 우리의 스마트폰에는 많은 사진이 남아 있다. 찢어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지워봐야 모든 흔적은 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다. 하나하나 찾아서 완전히 삭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날 당신의 페이스북은 ‘4년 전 소중한 그날’이라며 헤어진 연인과 찍은 당신의 사진을 기어코 찾아내 들이밀고야 말 것이다. ‘김성호의 회상’을 작곡하고 부른 가수는 김성호다. 그는 다른 가수들의 노래도 작곡했다. 그중 많은 노래가 차트에서 성공을 거뒀다. 박성신의 ‘한번만 더’, 박준하의 ‘너를 처음 만난 그때’, 그리고 김지연의 ‘찬바람이 불면’이다. 모두 이별의 아픔을 솔직하게 그려내는 슬픈 노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노래들은 원 히트 원더로 끝이 났다. 김성호도 원 히트 원더로 끝이 났다. 한곡 정도가 더 인기를 얻었지만 그 사실은 그냥 지나쳐도 좋을 것이다. 계속해서 히트곡을 내는 가수는 생각보다 드물다. 많은 가수가 데뷔곡의 영광을 기억한 채 새로운 노래를 발매한다. 히트는 아니지만 중박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데뷔곡의 영광은 잘 돌아오지 않는다.
한번 더 찾아올 것 같은 최고의 시절
그러나 올 수 없는 빛나는 순간 닮아
인생도 그렇다. 우리 인생은 대개 원 히트 원더다. 어떤 사람에게 그 ‘히트’는 대학입학시험일 것이다. 누구에게는 입사시험일 것이다. 누구에게는 빠른 진급일 것이다. ‘마용성’ 아파트 구입이나 코인 ‘떡상’일 수도 있다. 좀 더 로맨틱한 예를 들어보자면 일생의 사랑을 만났을 때? 인생의 원 히트 원더는 가장 빛나던 순간에 잠깐 빛을 발한다. 다시 그 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그걸 좇으며 산다. 어쩐지 계속 손에 잡힐 것처럼 느껴지는 탓이다. 얼마 전 나는 오디션 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 시즌10을 봤다. 오디션장에는 돈과 명예를 꿈꾸는 젊은 래퍼들 사이 몇몇 익숙한 얼굴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정상의 래퍼로 활동한 ‘산이’와 ‘얀키’, 시즌4의 우승자인 ‘베이식’이 초조하게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나오는 장면에서 기적을 바랐던 것도 같다. 다시 기회를 얻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들의 전성기는 끝이 났다. 전성기가 끝난 사람들이 다시 기회를 얻는 일은 그리 자주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랩을 잘 알고 있다. 한때 빛나던 그들의 랩은 (냉정한 말이지만) ‘올드’하다. 랩에도 트렌드가 있다. 그걸 가장 잘하는 사람들은 갓 20대가 된 신인들이다. 단어도 다르고 플로(흐름)도 다르다. 새롭다. 인생이 원 히트 원더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 세대에게 히트의 기회를 호탕하게 물려주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당신은 당신 세대가 여전히 뭔가를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개혁할 수 있다고 믿는다.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다고 믿는다. 새로운 세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도 알고 있다. 그 믿음을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각자의 ‘원 히트 원더’만을 영원히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좇고 갈망하며 황혼기로 달려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찬바람이 불던 날 그 순간은 떠났고 계절은 바뀌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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